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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영화리뷰]친구의이름.늑대와춤을(Dances With Wolves.1990)

by 꿈꾸는구름 2019.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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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을 포함한 다수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화의 메인 포스터 (다음 발췌)

  194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나오는 서부극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설사 나온다 하더라도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는 어려웠고, 조용히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게 다반사였다. 90년에 제작된 '늑대와 춤을'은 제작 당시 이런 우려를 동등하게 받고 있었고, 감독이 연출의 경험이 없었던 영화배우 '케빈 코스트너'였기에 그 우려는 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선에 코웃음이라도 치듯 이 영화는 흥행과 평단의 호응을 얻게 되고,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등 7개 부분에서 수상하는 파란을 일으킨다. 제작, 감독, 주연을 한 케빈 코스트너의 멋진 한방이었다. 원작은 '마이클 블레이크'가 쓴 동명 소설로 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까지 참여한다. 케빈 코스트너는 연출을 함과 동시에 영화 속 주인공인 '존 덴버 중위' 역할도 매우 훌륭하게 해내었다. 이로써 영화계에 배우겸 감독이 또 한 명 탄생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차기작 [ 포스트맨 ]은 폭망을 하게 되지만 말이다.

주인공 '존 덴버' 중위(케빈 코스트너) (다음 발췌)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낀 존 덴버 중위는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엉겁결에 전쟁 영웅이 되고, 스스로 변두리 지역인 서부지역으로 전출을 자처한다. 요새라고는 하지만 달랑 집 한 채가 전부 인, 이미 파견된 병사들은 모두 도망가버린 요새에서 그는 편안함을 느끼며 자신이 바라던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한다. 그의 친구는 애마인 말 한 마리와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늑대 한 마리뿐. 선한 인디언 부족인 수우족이 우여곡절끝에 그와 친구가 되고 늑대와 들판에서 뛰놀던 모습을 보고 수우족은 덴버 중위에게 '늑대와 춤을'이란 멋진 이름을 지어준다.

'늑대와 춤을' 추는 덴버 중위 (네이버 발췌)

  수우족의 이름도 다 이런 식이다. 족장인 '열마리 곰', 인자하고 너그러운 '걷어차는 새', 용감한 청년 '머리에 부는 바람', 백인 여자인 '주먹 쥐고 일어서'. 자연속에서 동화되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은 아름다운 이름들이다. 그들의 이런 이름처럼 그들은 완전히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외부에서 온 '백인'들은 그저 침략자일 뿐이었다. 지금 세상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당시 미국인들의 행위들이 야만적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미국인(백인들)이나 인디언이나 마찬가지 입장이었을 것이다. 당신엔 서로가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뺏지 않으면 빼앗기는 적이었을 뿐이다.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수월한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해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보다 인간적인 것, 휴머니즘에 대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한번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는 정작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중요하며 간단하기까지 한 기본적인 가치를 이미 잊고 살아가고 있다. 가족, 사랑, 우정, 의리, 포용, 양보와도 같은 인간적인 것들을 벗어났지만, 뒤떨어진 문명에서 야생 부족 생활을 하는 인디언 '수수'족이나 서부의 늑대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머리에 부는 바람'(로드니 A 그랜트)과 '걷어차는 새'(그레이엄 그린) (다음 발췌)

  일반적으로 백인은 침입자로 인디언은 영토를 빼앗기는 피해자로 비추어진다. 미국의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는 죄없는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자신의 영토를 뺏기는 억울한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같은 백인일지라도 호의적이고 평화적인 '존 덴버' 중위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침입자이자 정복자의 이미지로 비추어지는 '기병대'도 있다. 인디언도 마찬가지이다. 평화적인 '수우족'이 있는가 하면, 호전적이고 매우 잔인한 '포니족'도 있다. 그래서 단순히 백인은 침략자, 인디언은 피해자로만 보는건 옳지 않다. 인간은 개개인이 매우 다르므로. 영화에서 미군의 군대는 초원의 늑대에게 장난 삼아 총질을 하고 서로 자신이 맞추었다고 기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악에 근거한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뒤떨어진 문명세계를 사는 수우족은 사냥을 할 때는 먹이사슬의 관계 위에서 생존을 위하여 사냥을 한다. 

친구가 된 존 덴버 중위와 수우족 전사들. (다음 발췌)

  수우족이 먹고 살기위해 사냥을 하는 것을 보면 문명과는 뒤떨어진 원주민 같은 느낌도 들 수 있지만, 이들은 너무나도 착하고 선하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백인들의 사회에서의 인간들은 도태되고 기본적인 도덕의 개념조차 결부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선악의 기준은 역시 사회제도, 사회적 배경이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여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모습이 영화에 등장하는 '존 덴버' 중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문명'이라고 자부하는 사회에서도 설곳을 잃어 방황을 하다가 죽음까지 내몰린 상황에서 아주 우연히 영웅이 되고 원하는 대로 '자연'속으로 들어가 삶을 살게 된다. 그곳에서 또다시 우연히 만난 '수우'족 인디언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문명이 반드시 '인간성'과 결부되어 형성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는 '자연'속에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 '수우'족이 인간적이고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매우 웅장했던 버팔로 사냥장면 (네이버 발췌)

  추장격인 '열 마리 곰'에게 '늑대와 춤을'은 말한다. 자신의 미국에 대한 배반 행위 때문에 미국이 자신을 쫓고 있고, 자신이 수우족과 함께 있으면 수우족도 위험해진다는 것을 걱정하여 늑대와 춤을 은 부족을 떠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열 마리 곰'은 미국인인 존 덴버는 여기 없다. 오직 수우족인 '늑대와 춤을'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을 방문자나 경계해야 할 이방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족으로 생각하는 수우족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존 덴버'중위는 이미 '늑대와 춤을'이 되어 있었다. 자아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들에게 이미 동화되었고 가족과 화목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수우족에게 그는 이미 가족이었다. 하지만 끝내 '늑대와 춤을'과 '주먹 쥐고 일어서'는 수우족을 떠나게 되고 마지막 순간에 그들을 산 위에서 내려다보며 '머리에 부는 바람'은 외친다. '늑대와 춤을, 머릿속의 바람이다. 나는 당신의 친구이다. 당신은 나의 친구인가?' 모두를 화합시키는 것은 단순한 것들에서 나오는 법이다. 고도로 가속화되는 문명 속에서 인간은 휴머니즘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익과 물질에 매달려 서로를 짓밟고 죽이는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소박한 아메리칸 원주민인 수우족의 문명과 사회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3년 후 , 그들의 마을은 폐허가 되고, 그들의 버팔로도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수우족은 네브라스카 로빈슨 요새에서 백인에게 항복했다. 평원의 위대한 기마민족 문화는 사라지고, 서부개척은 역사속으로 소리 없이 묻혀갔다. 자신의 친구에게 이름을 지어준 그들의 소소한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과 자유로움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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