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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영화리뷰]아프고아파도.아무도모른다(誰も知らない,NobodyKnows.2003)

by 꿈꾸는구름 2019.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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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을 포함한 다수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화의 메인 포스터(다음 발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무책임한 엄마가 그대로 집을 나가면서 방치된 아이들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보는 내내 이 작품이 '픽션'이기를 마음속으로 바랐지만 '논픽션'이라는 사실이 마음 한구석을 찔렀다. 그것도 매우 날카롭게. 그리고 한동안 큰 생채기로 남아있었다. 가장 장남이었던 첫째의 나이는 불과 12살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14살이었다고 한다. 12살이든 14살이든 너무나 어린 나이에 한명의 동생도 아니고 세명의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가혹하다. 그동안 이사를 하는것조차 굉장히 힘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에게 인사를 한 첫째를 제외한 세명의 아이들은 집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든다. 처음부터 이 곳은 엄마와 첫째만이 사는 집으로 규칙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참 뛰어놀아야 할 나이였지만 동생들은 베란다조차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어느 날 첫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철없는 고백을 한 후, 돈봉투와 메모를 남기고 엄마는 집을 비운다. 모두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였지만 엄마는 연락조차 하지 않고, 아이들은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게 된다.

엄마와 네아이들. 밝아서 더 가슴아팠던 장면 (다음 발췌)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들의 표정을 보게 된다. 그 표정이 백 마디 대사 대신 모든 것을 말해준다. 어느 무덥던 날, 전기가 끊기고 무덥게 끓는 방안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아이들. 엄마에게, 오빠에게 서운하고 본인도 하고 싶은게 많지만 내색하지 않아야 했던 장녀. 동생들을 최대한 잘 챙기려 하지만 본인도 힘없고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장남의 미안한 표정. 등등 아무것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기도 하며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 그리고 더 이상 엄마가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지 점점 굳어가는 표정. 영화는 너무 잔인하리만큼 덤덤하게 흘러간다. 아이들의 표정도, 연출도 심지어는 관람하는 나의 표정도 덤덤하기 그지없다. 울고불고해서 관객들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게 아니라, 다큐적인 관찰로 아이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게끔 감독의 의도한대로 연출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도 아이들이 생각났다. 

너무나 밝은 장녀와 막내 (다음 발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지만 많은 부분이 영화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주위의 무관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만큼은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일본의 국민성을 나타내는 이 문화는 나쁘게 변질되어 '주변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로 서서히 바뀌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만든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기에 사회에 경종을 울릴만한 이야기였고, 영화적으로도 잘 표현이 되어 이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시나마 일탈로 놀이터에 놀러간 사남매 (다음 발췌)

  영화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의 상황은 점점 극한으로 치닫지만, 색감은 따뜻하고 청량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종종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웃음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아이들 개개인이 현실을 참아내고 있는 모습과 장남인 아키라의 어른도 아이도 아닌 눈빛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아키라는 그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야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보인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빠와 아들이 야구하는 소리, 먹을것을 사 오는 길에 주운 공, 그리고 음료 캔을 쓰레기 통에 던져 넣은 모습 등. 동경하는 것이 있으나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참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아이가 참아내고 있는 동안 아이의 바지는 길이가 짧아져 맞지 않게 되고, 옷은 해져 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대신하여 추위에 떨며 세일하는 크리스마스 케익을 사고, 아이들의 세뱃돈을 마련하고,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등 살아나갈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아키라에게 감독이 가졌던 의문과 동일한 의문이 들었다. '첫째는 왜 도망가지 않고 동생들을(친동생들도 아니다) 끝까지 돌보았을까?' 자녀들을 두고 가버린 엄마나 누군지도 모를 아빠들(아이들의 아빠가 모두 다르다.) 보다 어린 아키라가 더 어른스럽고, 어른스럽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동생들을 보살핀 것이리라.

지쳐가는 아이들 (다음 발췌)

  아이들은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순응하는 모습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키라는 친구의 아빠에게 돈을 구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위해 아빠들을 수소문해서 찾아가 도움을 구하지만 그들조차 최소한의 양심으로 조금의 돈을 쥐어주면서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어른들은 정말로 아무도 몰랐을까? 집세를 받기 위해 찾아온 집주인은 엉망인 집과 아이들을 보고서도 엄마는 일하러 갔다는 말에 못 본 척 발길을 돌리고, 공과금을 받기 위해 찾아 온 사람도 무심하게 할 일만 하고 돌아갈 뿐이다. 엄마가 오래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도 아버지들은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는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길거리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사남매 (다음 발췌)

  아무도 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 생긴 일들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무관심이 무서운이유는 모두들 비극이 일어날 거라 짐작하면서도 외면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세상은 이웃에게 관심을 갖거나 하지 않는다. 가족에게 조차도 관심을 갖는 사회가 아니니. 그럼에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아주 조금만 고개를 돌리고,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것들. 이 영화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나 어린아이의 죽음은 더욱 그렇다. 한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것은 한 세계의 종말과도 같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셀수 없을 만큼의 세계가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영화와 같은 비극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타인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비극을 외면하는 것을 다그칠 수 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무도 모르는 세계를 아는 것은 한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임을. 아키라의 변해가는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생명이 꺼져가는 듯 희미해져 가는 눈 속의 생기가 잊히질 않는다. 아마도 칸 심사위원들도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같은 후보에 올랐던 '올드보이'의 '최민식' 배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어린 친구가 받을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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