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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영화리뷰]숨막히는희망.베리드(Buried, 2010)

by 꿈꾸는구름 201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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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을 포함한 다수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강렬하고 정확한 메세지를 던지는 포스터 (다음 발췌)

  이 영화로 리뷰를 쓰자고 맘먹었을 때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미지'였다. 대여섯 장의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있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시나리오로 극찬을 받은 영화이지만 너무나 한정된 이야기에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아이디어로 극적인 연출에 결정적 도움을 준 '촬영'이야말로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한 남자가 있다. 깨어보니 겨우 누울 만한 관에 갇혀 있다. 가지고 있는 건 전화기, 라이터, 야광봉. 자... 벌써 답답하다. 공포영화만큼 인간의 본성을 까발리고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장르는 없다.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 앞에 도덕적 허세로 자신을 감추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는 본성과, 타인의 지옥을 보면서도 여러 가지를 계산하는 사회 현실 등, '공포'라는 이름하에 가려졌던 인간과 사회의 추악한 면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딱히 공포영화라고는 할 수 없으나, 좁은 관 안에서 생매장돼 죽을 위기에 놓인 미국인 폴의 생존 사투를 그린 이 영화는 공포영화만큼이나 섬뜩한 인간의 본성과 그보다 더 섬뜩한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그리고 있다.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트럭운전사 '폴 콘로이' (라이언 레이놀즈) (다음 발췌)

  '베리드'는 독특한 소재만큼이나 첫 장면이 매우 낯설다. 조명하나 보이지 않고 누군가의 숨소리만 스크린에 가득하다.영사사고인 줄 알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라이터 불빛과 함께 주인공의 얼굴이 보이고 관객들이 안심하게 되는 찰나 다시금 더 큰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무대는 2미터도 채 안되는 좁은 관이지만 이야기는 미국의 모든 시스템을 아우를 만큼 넓은 이야기이다. 좁은 곳에서 정말 많은 것을 담아냈다. 내가 만약 이 시나리오를 받아 든 제작자라면 생매장당하는 한 남자를 그린 이야기이며, 세트는 오로지 관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말을 듣는다. 이걸 어떻게 영화로 만들지?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을 것 같다. 소재가 무척이나 특이해 워낙 끌렸지만 10분 동안 어떤 배경 전환도 없이 주인공의 숨소리와 폐소 공포증만 보고 있자니 제아무리 어떤 소재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필름 메이커, 미국이라도 이번에는 욕심이 과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편견마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이 영화는 독특한 설정에 익숙해질 때쯤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폴에겐 라이터, 전화기, 야광봉이 전부다. (다음 발췌)

  영화의 유일한 등장 캐릭터이며 주인공인 라이언 레이놀즈의 연기에 대한 칭찬은 차라리 집어치우고. 정말 완벽한 1인극을 선사했다는 말이다. 그 수다쟁이 '레드 풀'이 말이다. '베리드'가 진정 대단한 것은 앞서 얘기했지만 좁다 못해 보는 관객들도 숨 막힐 그곳에서 고작 라이터, 휴대폰만을 가지고도 수많은 카메라 앵글과 자연스러운 쇼트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재도 독특하지만 영상의 기발함은 더 대단하다. 고립되어 점차 희망을 잃어가는 폴의 심리에 맞추어 장면 전환되는 효과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이다. 좁은 것은 현실의 '관'이지 영화의 무대장치인 '관' 마저 현실적 개념에 유형화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의 약점이 될 것만 같았던 좁은 무대장치가 영화 최고의 강점이 된 후, 이야기는 질주를 한다. 요즘 아이폰의 HD 영상 녹화 기능으로 시리즈 영화도 만들 수 있다는 시대에, '베리드'는 HD 영상까지도 필요 없다. 그저 휴대폰의 음성과 저화질의 녹화 기능만 있다면 휘황찬란한 IT 기계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저 휴대폰의 음성으로만 계속되는 이야기 전개는 영화 속 폴과는 다른 의미로 관객들을 숨 막히게 한다.

엄청난 연기를 펼친 라이언 레이놀즈 (다음 발췌)

  하지만 의외로 '베리드'는 추리 요소가 강한 영화는 아니다. 관 안에서도 탈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와 퍼즐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휴대폰이라는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베리드'에서 폴이 탈출해야 하는 것은 지금의 좁은 관에서의 생매장이 아닌, 사회 시스템에서의 '생매장'이었다. 국제 전화까지 해대며 구조를 요청한 평범한 트럭기사인 '폴'은 기업의 이익과 국가의 체면 앞에 의미 없는 목숨으로 전락한다. 미국의 대테러 작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미국 소시민의 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은, 다급하게 목숨을 구걸할 때마다 차갑게 외면하며 책임자에게 전화를 넘기겠다는 냉정한 그들의 목소리처럼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어떤 단서를 찾아내어 탈출에 포커스를 잡은 '큐브' 같은 퍼즐 영화를 생각하고 '베리드'를 본 관객이라면 답답하게 조여 오는 주제의식 때문에 마음의 산소가 모자를 지경일 것이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척, 노동자를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지배계급과 피지배 사회가 존재하는 지금, 그 가면이 벗겨지고 난 뒤에 보이는 사회에서 생매장당하는 주인공 폴은 영화의 상황보다 더 잔인하다.

주인공인 '라이언 레이놀즈'와 감독인 '로드리고 코르테스' (다음 발췌)

  '베리드'는 매우 독특한 아이디어로 출발해서, 상황 설정의 긴박함과 그 사이 어떤 정치 영화도 쉽게 다룰 수 없는 국가의 권력 앞에 희생당하는 개인의 불운을 절박하게 묘사했다. 더 놀라운 것은 무대 장치는 달랑 좁은 관 속이지만,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이 굉장히 많은 것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분명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중성에 굉장히 분노하겠지만, 그러한 모습까지 놀라운 아이디어로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미국' 영화에 대한 대단함도 동시에 느껴지는 아이러니함이란. 영화적으로는 매우 잘 만든 영화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느껴지는 '허탈감'이라는 게,비단 영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만이 아니라 시스템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못했다는 부분이 가장 컸다. 숨 막히는 희망을 보여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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