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말을 포함한 다수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다이하드>는 한마디로 남자의 영화다. 맨 주먹으로 상대와 격돌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그런 남자의 영화다. 이런 영화에선 악당은 비열하다기보단 냉철하고 강하기 마련이고 주인공은 착하기보단 끈질기게 묘사된다. 강하고 치밀하고 때로 멋지기까지 한 악당들에게 대항하여 단 한 명의 사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그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처럼 한 팔에 중화기 하나씩 들고 무지막지하게 상대를 향해 갈겨대거나 탐 크루즈처럼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채 쿨한 미소를 날릴 여유가 없다. 그저 늘어진 런닝셔츠 하나 걸치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이리 뛰고 저리 뛰기에도 바쁜 것이다.그는 그야말로 '아날로그' 액션 영화의 영웅이다.
이곳 저곳, 안 다니는 곳 없이 건물을 헤집고 뛰어다니며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 땀에 절은 런닝을 걸치고 헉헉대는 존 맥클레인 형사를 보면 멋지다기 보다는 차라리 안쓰럽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지지리도 강한 운으로 마침내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21세기의 현란한 액션과는 또 다른 숨막히는 아날로그적인 충격이 느껴진다. 198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액션 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한편의 액션 영화에서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나오면서, 그 인물 각각이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고, 이야기가 다채로우면서 흐름을 잃지 않는 영화는 그 이전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별로 본 적이 없다. 이 영화는 세가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감독인 존 맥티어난, 주인공이었던 브루스 윌리스, 그리고 맥클레인 형사가 사용했던 '베레타 M92F 권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맥클레인 형사가 처한 상황이 참 특이했다. 뉴욕 경찰인 그와 달리 유능한 직장인인 아내는 자기 직장을 따라 자녀를 데리고 LA로 가버렸고, 그나마 LA에서는 남편 성이 아닌 원래 자기의 성을 그대로 쓴다. 미국에서는 이게 큰 의미이다. 크리스마스에도 부인이 남편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남편이 부인을 찾아가야 한다. 이쯤 되면 경찰일 해서 먹고사는 남편의 꼴이 초라해질 만하다. 신기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부인이 일하는 곳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일본 회사에 일본제 빌딩이다. 그리고 그 회사에 쳐들어 온 악당들은 유럽의 프로 범죄자들이고 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영화의 설정이 우연히 그냥 만들어진 설정은 아닐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미심쩍은 혐의를 확실히 확인해주는 것이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비행기 여행도 익숙하지 않고, 여자앞에서의 감정표현도 서툴지만, 정통 서부극을 좋아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고색창연하고 전형적인 미국의 중하층 남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다. 1980년대 미국인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일본이 우리에게 그러하듯이. 국내외 시장에서는 고급품은 유럽제에 밀리고, 대량 생산품은 일제에 밀리는 미제들이 미국인들을 기죽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이혼율의 증가와 함께 '여권'이 신장되면서 미국 남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아주 심각했다. 내우외환이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정치판에는 도널드 레이건을 앞세운 강력한 미국을 주창하는 보수주의가 등장했고, 영화판에는 <다이하드>가 나왔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당시 미국남자들이 느끼던 위기감, 상대적 박탈감들을 콕콕 집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유럽 악당들을 물리치고 자기 가지를 발휘하는 모습은 결국 모든 미국인들에게 "용기를 내자!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저력이 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속편들도 모두 작품성이 뛰어난 수작들이었지만, 이 1편만큼의 아우라는 갖고 있지 못한데, 그것은 아마도 1편의 주인공과 관객들이 공유하던 내우외환의 절박함이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액션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멋지고 폼나는 액션을 선보인 것도 아니고 엄청난 체력에 싸움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닌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맥클레인 형사가 그토록 환호를 받은건 시대 상황에 부합되는 시나리오 상의 설정도 잘 맞아떨어진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설득력있는 캐릭터의 설정이 주효하지 않았나 싶다. 12명의 프로들과 싸움을 진행하면서 너무 지쳐보이는 모습이라던가, 맨발로 깨진 유리들을 밟고 지나가는 모습은 영웅의 이미지라기 보단 우리곁 어딘가에 있을 법한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해서 사실감이 넘친다. 그리고 촬영당시에는 무명이었던 브루스 윌리스의 친근함도 한몫을 했으리라고 본다. 거의 30년전의 작품이긴 하지만 그다지 세월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이기에 잘 아껴두었다가 꺼내보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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