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리뷰

[영화리뷰]눈물조차흘릴여유가없는.가버나움(Capharnaum.2018)

by 꿈꾸는구름 2019. 10. 16.
반응형

- 결말을 포함한 다수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화 '가버나움'의 포스터 (다음 발췌)

  영화의 시작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레바논 베이루트의 어느 빈민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롱테이크 '이제부터 이게 너의 시선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감독의 설정은 그렇게 주인공과 나의 철저한 거리감을 두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가버나움'의 주인공은 빈민촌에 사는 소년 '자인'이다. 대략 12살 정도로 추정(?)되는 이 소년은 네명의 동생들과 부모와 함께 살고는 있지만 그들의 생활환경이란 위생과 청결과는 거리가 있다.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그들에게 그러한 것들은 사치에 불과하다. 카메라는 첫 장면의 극 부감샷을 제외하고는 주인공 소년의 시선위치에 머물러 세상을 보고 있다. 완벽한 소년의 시점으로 일반 관람객들의 시선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거리감'을 두게 된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자인'역의 자인 알 파리아 (다음 발췌)

  감독은 왜 그렇게 철저하게 관람객들의 시선을 영화와 거리감을 두게 한 것일까? '관찰자'로서 영화를 그저 바라보게만 한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려오는 현실을 바라보고만 있는 안타까움과 함께 의문이 들었다. 베이루트 빈민촌의 현실을 나열하며 실상을 폭로하는 다큐멘타리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많은 결심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무심하지만 뭔가 따뜻한 느낌의 소년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만 보고 덜컥 영화를 본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믿기지 않는 현실들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자인의 유일한 희망인 여동생 '사하르'역의 아이타 하이잠 (다음 발췌)

  부모가 출생신고도 하지 않아 문서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오늘도 최선을 다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삶을 살아간다기 보단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듯 보인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발전의 여지도, 개선될 의지도 없어보이는 완전한 절망의 늪에 빠져있다. 자인의 부모는 자식들을 하나의 인격체나 가족으로 생각한다기 보단 '생산'에 필요한 부품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듯 하다. 자인이 아끼는 여동생인 '사하르'가 제대로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게 되지만 그의 어머니라는 사람은 자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데려가면 하나를 더 주신단다. 나 임신했단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사하르'라고 지을꺼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사람을 어른이라고 해야할까. 생식능력으로는 어른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과연 이런 사람이 어른이고 부모인가. 극의 효과를 위한 극적인 대사라고는 하지만 자인의 부모가 초지일관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보면 그들을 나타내는 중요한 대사라고 생각한다. 

부모로부터 도망쳐서 유원지로 간 자인 (다음 발췌)

  자인은 영화내내 무표정하다. 얼굴에 변화가 없다. 삶에 지쳐있는 아이에게서 '아이같은' 다양한 표정을 바라는게 어불성설이긴 하겠지만 그 표정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일이 아니기에, 우리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우리는 값싼 동정심 어린 연민을 가질 뿐이다.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그 현실은 가장 '현실감'이 없어 보일 정도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영화 제목인 '가버나움'은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 성스러운 곳이었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아서 예수는 멸망을 예고한 성서속 마을로 지금은 '지옥'이나 '카오스(혼돈)'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자신도 어려운 환경의 불법체류자 신분이지만 더 어려운 '자인'을 돌보아주는 '라힐'역의 요르다누스 시프로우 (다음 발췌)

  영화속 등장인물들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이지만 그들의 생과 사는 남들에게, 혹은 그들의 부모에게 조차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며 어쩌면 고단한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그들 자신에게조차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감독인 '나딘 라비키'는 성경에 등장하는 마을인 '가버나움'을 제목으로 지은 이유를 자신이 염두해 놓은 주제인 아동 학대, 난민 문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서류 등을 나열하다가 생각했고, 각본을 쓰기전에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어러운 상황이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요나스'를 돌보기로 한 자인 (다음 발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놀랍게도 모두 실제 난민과 불법체류자들이라고 한다. 시리아의 시장에서 배달을 하던 소년인 '자인 알 라피아'는 현지 스태프의 눈에 띄여 캐스팅 되었으며, 자인의 여동생역을 연기한 '하이타 아이잠'도 거리에서 껌을 팔던 소녀였다고 한다. 불법체류자인 '라힐'역을 연기한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도 실제 불법체류자라고 한다. 이들의 연기는 모두 실제였으며 그로 인해 영화는 다큐인지 극영화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자인과 요나스에게 현실은 너무도 냉혹하다. (다음 발췌)

  자인은 자신을 낳게 한 이유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고, 돌보지 않아 고통뿐인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거칠지만 듣기 불편한 사실들은 가슴에 비수로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그런 자인의 부모들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죽을힘을 다해 사는데도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사람들을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조차 영화속에 나오는, 난민촌에서 위로한답시고 노래를 불러대는 어느 종교집단의 사람들처럼 와닿지 않는 그들만의 자위같은 위로가 될까 두렵긴하다. 영화를 보고나면 수많은 질문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해답을 절대 주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를 고소하기 위해 법정에 선 자인과 변호사 (감독인 나딘 라바키) (다음 발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다만 그 눈물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극중 자인을 위한 것인지 냉정하게 살펴 볼 가치는 있다. 그 눈물이 어느쪽을 향해 있던지, 감독이 바랬던 관찰자로서 지구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알게 되는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영화에 출연한 소년 소녀는 처음으로 '출생신고서'를 갖게 되었으며, 유엔의 보호아래 교육을 받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보다 나은 결말이 되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