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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영화리뷰]홀로코스트속으로.사울의아들(Saul fia.Son of Saul.2015)

by 꿈꾸는구름 2019.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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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을 포함한 다수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화의 메인 포스터 (다음 발췌)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단어는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하며, 특히 1945년 1월 27일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 홀로코스트 [Holocaust] (두산백과)

  '홀로코스트'는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재를 다룬 영화들은 이미 많이 제작이 되었으며 '쉰들러의 리스트''인생은 아름다워''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피아니스트' 등 공통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얘기하지만 풀어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 '사울의 아들'도 역시나 궤를 함께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아주 독특하고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주인공인 사울역의 '게자 뢰리히' (다음 발췌)

  주인공인 '사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더 코만도'라는 '시체 처리반'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등에 커다란 'X'자를 표시하고 일반 포로들과는 다르게, 상대적이긴 하지만 수용소 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들은 동족들의 죽음을 바로 코앞에서 매일 목격을 하며 그들의 의복을 정리하고, 시체를 처리하고 가스실을 청소한다. '사울'의 표정은 당연히 매우 어둡고 거의 항상 바닥을 바라보며 다른 이들, 특히나 가스실에 들어가는 동족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살아있긴 하지만 지옥과 같은 삶속에서 '인간성'을 상실당한 채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이미 죽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운명도 그리 길지 않아서 보통 3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면 다른 사람들로 교체가 되고, 자신들도 자신들이 처리했던 많은 유대인처럼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 한다. '존더코만도'의 첫 임무는 전임자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잔인하다. 인간의 잔인함은 어디까지일까.

자신의 아들의 시신을 발견하는 '사울' (다음 발췌)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이 영화가 첫 장편 데뷔작인데 전 세계에서 무려 86개의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천재 감독의 데뷔를 알린 영화인데, 반면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무척 불친절한 영화이다. 촬영 전 감독과 촬영감독은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하는데, 카메라는 항상 '사울'을 따라다니며 그의 시야, 청각, 행동반경의 실재 범위를 벗어나지 말것. 이었다. 이로 인해 관객의 시야를 극히 제한하고 인물의 눈높이를 유지해서 따라가는 '새도우 촬영기법'을 도입했다. 한마디로 주인공의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촬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화면도 일반적인 16:9의 비율이 아니라 거의 4:3에 가까운 비율의 화면을 보여주는데 안 그래도 화면의 거의 70%가 '사울의 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주변도 거의 막혀 있어서 화면을 보는 관객들은 매우 답답함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우슈비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답답하고 숨막히는 그 곳으로.

자신의 아들 시체 앞에 선 '사울' (다음 발췌)

  배경 장소가 아우슈비츠이기에 수많은 시체들이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자세히 보여 주지 않고 거의 사울의 배경으로 흐릿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럼에도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시체들에 오히려 더 자세히 몰두하게 되어, 끊임없이 나오는 시체들을 보기가 나중에는 감독의 의도대로 대단히 불편해진다. 대놓고 보여주는 것보다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에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노린 감독의 영리함이 느껴진다. 또한 영화는 모든 현장음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화면의 답답함에 보이는 게 한정적이다 보니 관객들은 자연스레 소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되고, 단지 '소리'만으로 현장의 처절함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홀로코스트 속으로 데려가려는 감독의 매우 철저한 계산이 반영된 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사울' (다음 발췌)

  '사울'은 그 지옥과도 같은 홀로코스트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발견하고, 아직 숨이 남아 있는 그 아들을 독일군이 목을 졸라 죽이고 부검을 지시하라는 장면도 몰래 숨어서 지켜본다. 그리고 아들의 주검 앞에 선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이미 그는 인간성을 상실해 버린 '기계'와도 같은 사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왜 일지 그는 유대인의 율법대로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자 아들의 시체를 몰래 빼돌리고 장례를 치러 줄 랍비를 수용소 내에서 찾아 헤맨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는데,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걸 이해하는 사람과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주변인들까지 희생당하게 하며 장례를 치르어야 했을까 하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실제 '아들'이 있는 사람으로서 장례를 치르고자 노력하는 사울이 이해되기도 한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현실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단 하나의 의미 있는 일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 했을 수 있으니까.

랍비를 설득하는 사울 (다음 발췌)

  사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장례를 치르고자 노력했던 그 아이가 과연 진짜 사울의 '아들'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보통 '딸은 엄마의 분신이고 아들은 아빠의 분신'이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그 분신과도 같은 아들의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인간성이라고는 모조리 빼앗겨버린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이미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울이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찾고자 하는 마지막 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다른 동료인 아브라함이 '너에게는 아들이 없어'라는 대사도 나온다. 관객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어쩌면 사울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그 대상은 사울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 사울에게 그저 한 '대상'일 뿐일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사울'은 마치 기계 같은 소모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자아를 잃어버린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아들'이라고 정한 그 분신을 인간으로 묻어주고자 마음먹은 시점부터 사실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우 좁은 시야로 수용소안의 답답함을 표현했다. (다음 발췌)

  영화의 마지막에 죽음을 맞이 하는 존더 코만도들 사이에서,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던 한 소년을 발견한 사울은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영화 내내 어둡고 좁게 보이던 화면에는 빛이 보이고 영화는 끝난다. 사울의 마지막 미소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기계 같은 움직임을 보이던 그가 마지막에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성'이 회복된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하여 살아있음을 느낀 자에게 죽음의 순간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사울은 미소를 지어 보임으로 평화로운 세상으로 인도된다. 더불어 그 순간 영화의 화면은 처음으로 어둠에서 벗어나 밝아진다. 107분 동안 관객의 숨통을 옥죄던 어둠이 빛에 의해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관객은 어둠과 빛이라는 극명한 대비를 통해 비극에서 벗어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흔하디 흔한 말이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 영화였다. 인간의 잔인성을 끝까지 보여주는 '전쟁'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지만 결코 잊어서도 안 되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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