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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영화리뷰]당신과나의이야기.82년생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2019)

by 꿈꾸는구름 2019.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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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을 포함한 다수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화의 메인포스터 (다음 발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개봉이 되기 전부터 이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소설을 먼저 읽은 나로서는 소설을 읽고도 한참 후에나 이 책이 일명 '페미니즘'논란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굉장히 의아해했다. '페미니즘'이라고? 왜 그런 생각들을 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라고. 그리고 영화가 만들어졌고 왠지 의무감 같은 게 생겨서 영화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도 여전히 많은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난 여전히 왜 양 진영을 나누어 이 영화에 대해, 그리고 소설에 대해 언쟁들을 하고 서로를 공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의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중대한 사항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인지 여전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이 영화를 '페미니즘'이라는 틀에 가두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영화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말 그대로 대중예술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비판을 '덮어두고'하는 듯한 인상을 버리지 못한다는데 있다. 과연 그들이 이 영화를 소설을 제대로 대하기나 하고 그런 말들을 쏟아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김지영'역을 용감하게 연기해 낸 '정유미' (다음 발췌)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읽고나서 내 두 여동생(77년, 80년생인)들에게 그리고 75년생인 와이프에게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느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그리 녹록지 만은 않겠구나 라는 게 첫 번째 느낌이었고 그런 가운데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움과 대견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난 '유대인'은 아니지만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보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했으며, '흑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수 세월 겪었을 차별과 불평등에 분노했다. 그것은 그저 지구라는 공동체 위에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공감'이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아니지만 동시간대를 살아온 남성으로서 그들이 겪었을, 또 겪고 있을 사회의 부조리와 편견, 차별 등이 이해가 되었고 공감이 되었다. '페미니즘'이 왜 불거져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지. 대상에 대한 각자의 이해하는 방법이 다르니 그럴 수는 있겠다 정도로 이해를 해보려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이게 그렇게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공론화되고 논란거리가 될 일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남편인 '대현'역 '공유'와 '김지영'역 '정유미' (다음 발췌)

  소설의 내용은 너무나 공감되고 좋은 부분이 많았지만 지극히 예술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부족한 부분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문체도 일반적인 작가들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고 제시한 대부분의 데이터에도 오류가 있는 등 따지고 들면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 수 있는 게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르포나 리포트처럼 82년생 김지영의 일대기를 피해의식이 느껴지도록 나열하는 수준이라는 것도 문제이긴 하다. 물론 그 안에 품고 있는 주제의식이나 사회에 던진 화두는 매우 유의미하다. 영화는 소설이 가진 모든 문제를 '통쾌하고 명쾌하게'(페미니즘이라고 욕하던 분들에게) 해결해 내었다. 그 부분은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극의 전개나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소 투박하고 흐름이 자주 끊기는 단점들이 분명히 존재는 하지만 '김도영 감독'의 중심 잡힌 시선을 영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내 일상에서도 많이 보아온 '아내'의 모습 (다음 발췌)

  집안에서 가사를 담당하고 있는 씩씩한 나의 아내도 생각이 났고, 대한민국에서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을 수많은 김지영들이 떠올랐다. 김지영이 외할머니로 '빙의'해 엄마에게 그러지 말라고, 더 이상 희생하지 말라고, 너의 삶을 살라고, 지영이는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도 몰래 눈물이 났다. 가던길을 멈추고 뒤돌아 지영이를 바라보며 슬픈 눈물을 글썽이는 지영의 엄마(김미경)를 보고 눈물이 또 났다. 이 영화를 무슨 '불온서적'처럼 대하고 비판하는 남성들에게 이 영화를 '반드시' 보고 나서 말을 던지라고 하고 싶다. 이건 그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실이고 내용이다. 이건 단지 '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애를 가진 사람이면 주변의 누군가나 지구촌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인류가 가져야 할 보편적인 가치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여성의 삶이 보인다. (다음 발췌)

  이 영화의 가치는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선악의 구조를 벗어나 공평과 불공평, 합리와 불합리, 사회구도적인 문제로 여성의 문제를 접근했다는 점이다. 내가 남자라서 불편해야 할 지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바라보는 대상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내가 아니기에 그 비난의 대상도 개인인 '내'가 아니다. 사회 시스템과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덮어놓고' 비난하는 피해의식 가득한 남성들에 대한 비난이다. 이 영화가 소설의 한계를 극복한 지점은 바로 그것이다. 남자인 내가 봐도 억지스럽지 않은 여성의 삶의 고된 부분을 보여주었다. 사회 구성원 누구든 삶의 힘듦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공평한 사회와 여성 혐오, 그로 인한 비하, 여성 차별에 대한 비판이 녹아 있지만 그 방식이라는 것이 극단적이지 않고 편향적이지가 않다. 페미니즘이라고 비판을 쏟아내던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영화 내내 흐르고 있는 감정선은 여성에 대한 '위로'이고 '응원'이다.  

'김지영'과 비슷한 삶을 살았을 그의 '엄마' (다음 발췌)

  가장 아쉬웠던 점은 '82년생'이라는 사회적인 장점을 살리지 못한 부분이다. 그냥 '김지영'이라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82년생'에 대한 활용은 없었다. 82년생들은 마지막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한 세대이다. 이들은 IMF를 맞으며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 과도기적 세대이다. 대학에 진학할 때는 세기말이었고 밀레니엄 전환기였으며 2002년 월드컵을 겪고 성장한 말 그대로 버라이어티 한 세대이다. 이런 82년생들의 코드를 영화는 하나도 활용을 하지 못한다. 물론 '82년'에 국한되지 않았기에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90년대 감성을 살리지 못한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지영'을 무난하게 잘 연기한 '정유미' (다음 발췌)

  영화는 예술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주제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의도가 담긴만큼 그 의도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은 세련되고 편향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보여준다'라는 의미는 구구절절한 서사보다는 인물의 움직임, 눈빛, 표정으로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점에서 '김지영'을 연기한 '정유미'나 그의 남편 '대현'을 연기한 '공유'의 연기는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고 그저 무난한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하고도 남음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김지영'의 엄마를 연기한 '김민경'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으며, 격하거나 큰 움직임이 없더라도 격한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보여준 좋은 예였다고 생각한다. 의도가 좋은 만큼 잘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도와 주제의식은 그것을 반대하는 '이해 못하는' 이들로부터 비판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이미 많은 논란이 되었음에도 용감하게 이 영화를 만들어 낸 '김도영' 감독의 뚝심 있는 시선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여성'의 영화라기보다는 '다양성'에 무게를 둔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을 맘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지영은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나를 얼마나 알기에 그렇게 함부로 평가를 하냐'고 소설과는 다른 결말인데 지영의 치유와 성장을 주제로 다룬 영화이기에 가능한 결말이었다. 부디 '페미니즘'을 외친 이들도 곁눈질으로라도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나서의 비판은 한 번쯤 나도 곁눈질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신들이 얼마나 이 영화를 알기에 그렇게 함부로 평가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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